부산고구려$ -차례- Ⅰ. 머리말 Ⅱ. 가루베의 공주에서의 유적 조사1. 조선총독부의 공주 송산리고분 조사 2. 조선총독부 조사에 앞선 가루베의 조사3. 송산리 제5호분과 제8호분 발굴4. 가루베의 공주 송산리 제6호분 도굴 Ⅲ. 가루베가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1. 송산리 제6호분 출토유물의 행방과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기념박물관에 들어간 가루베 수집품2. 도쿄국립박물관에 들어간 가루베 반출 유물3. 기타 가루베가 반출한 백제유물 Ⅳ. 가루베의 반출 유물에 대한 환수 노력 Ⅴ. 맺음말 Ⅰ. 머리말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일본 와세다대학 국한과(國漢科)를 졸업하고, 일본 문화의 연원(淵源)을 연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25년 3월에 한국에 건너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 고대사 강좌를 맡았다. 그의 포부는 평양 일대에 산재한 낙랑 및 고구려 유적을 연구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평양은 이미 1909년 이래 도쿄대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낙랑 및 고구려 유적 조사로 인해 상당한 연구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평양에서 교직생활을 할 즈음에는 낙랑고분의 대난굴 시대로 도굴품들이 시중에 마구 쏟아져 평양의 유지, 수집가들은 그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1925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왕우묘를 발굴하여 몽땅 그네들 대학으로 반출하여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낙랑 유적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해있을 시기였다.① 따라서 낙랑 유적 유물에 대한 연구열과 연구자가 많았던 시기인지라 젊은 그로서는 연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니 여간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참에 지인으로부터 백제문화 연구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낙랑이나 고구려 유적 조사에 비하면 백제 유적의 조사는 1915년 구로이타(黑板)와 세키노(關野)에 의한 부여 능산리고분의 일부 조사와 1917년 야쓰이(谷井)의 부여 능산리고분 조사 정도에 그치고 있어, 백제문화에 대한 연구는 가루베로서 구미가 당기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교수의 직을 버리고 1927년 1월에 공주로 내려갔다. 이때부터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근무하면서 백제 유적 연구에 몰두했다. 공주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가루베는 일본어와 한문을 가르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생도들을 이끌고 산야를 다니며 유적을 답사하고 기와조각 등을 채집하여 ‘와선생(瓦先生)’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②가루베의 유물수집 또는 조사 착수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고, 학생들이 조사한 지역의 전설, 고적, 유물 등에 대한 정보를 참고하여 직접 현지 조사에 착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에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간행한 『충남향토지(忠南鄕土誌)』를 보면 그러한 흔적을 볼 수 있다.③ 가루베는 1930년 3월에 교내에 향토관을 설치하고 “거교적으로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시대의 토기, 와당, 탁본, 사진, 기타 향토의 훈풍을 담은 여러 가지 유물 수집에 힘썼다.”고 한다.④ 윤용혁이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⑤에서 제시한 ‘가루베 지온 수집 유물에 의한 공주고보 향토실’ 사진을 보면 각종 수집유물이 잘 정리되어 진열되어 있다.가루베는 공주고보에 재직하면서 그가 공주일대에서 연구한 백제 유적에 대한 연구 성과를 『고고학잡지』에 1929년부터 1936년까지 게재하기도 했다.일제강점기에 가루베 만큼 집착적으로 백제유적 연구를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가루베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원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학술연구라는 미명하에 공주 일대를 샅샅이 훑으면서 총독부의 정식 허가도 없이 백제의 고분을 수없이 파헤쳤다. 공주 일대의 고분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고분이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가루베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공주일대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고분의 수는 1,000여 기나 되었다. 상당수는 그가 최초로 조사 내지는 발굴을 하였다. 물론 대부분은 도굴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그의 소장품들은 지표상에서 채집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고분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로서 은밀히 소장한 것이기 때문에 들어난 것이 드물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일본으로 반출했다.본 내용은 가루베의 공주를 중심으로 한 유적조사에 따른 유물 반출과 그의 불법 행위를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① 1925년까지 낙랑 및 고구려 유적 조사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1902년 關野貞의 평양 답사1909년 10월 關野貞 일행의 평양 석암리고분 조사1909년 11월 동경대 萩野由之, 今西龍의 낙랑고분 조사1910년 10월 關野貞 일행의 대동강면 고분 조사1911년 7월~10월 鳥居龍藏, 小杉彦治(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의 함북 유적지 조사1911년 9월 ~10월 關野貞 일행의 황해도, 평양 일대 고분 조사1912년 9월 關野貞 일행의 황해도 일대 고분 조사1912년 末松熊彦의 고구려벽화 조사 1912년 10월~1913년 3월 鳥居龍藏의 평안북도 및 만주일대의 유적 조사1913년 9월~10월 關野貞 일행의 만주일대 및 평남일대 유적 조사1914년 가을 谷井濟一의 평남 고분 조사1915년 6월 八木奘三郞의 황해도 도요지 조사1916년 3월 谷井濟一의 평남 만달산 고분 조사1916년 8월~9월 黑坂勝美의 평안남북도 유적 조사1916년 9월~10월 關野貞 일행의 평남일대의 대대적 고분 조사1917년 5월~7월 關野貞 일행의 황해도, 평안남북도 일대 고분 조사1918년 7월, 9월 谷井濟一의 황해도 고분 조사 1918년 6월 黑板勝美의 만주일대 유적 조사1919년 9월~11월 池內宏 등의 함경남도 함흥군일대의 산성 조사1921년 關野貞의 평양토성 조사1924년 10월 小場恒吉 등의 평양 대동강면 고분 조사1925년 10월~12월 原田淑人 등의 평양 대동강면 고분 조사(참고: 정규홍, 『우리 문화재 반출사』, 2012)② 小野眞一, 「輕部慈恩先生の死を悼む」, 『(月刊)考古學ジヤーナル』 51호, 1970년 12월.③ 『忠南鄕土誌』는 전설편, 향토사편, 토속자료편으로 나누고 전설편과 향토사편은 각 군별로 배열하고 각 지역의 고적 유물에 관한 것을 싣고 있다. 토속자료편은 풍속 관습, 민간신앙, 연중행사, 오락 유희, 가요의 5부로 나누어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학생들이 조사한 내용들이다. 전설편의 앞부분에 輕部慈恩의 「公州に於ける百濟遺蹟」을 싣고 있는데, 1934년 11월 『朝鮮』에 게재했던 것을 『忠南鄕土誌』에 그대로 게재하고 있다.④ 윤용혁,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 서경문화사, 2010.“私藏과 蒸發이라는 유물의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가루베 지온은 공주라는 공간을 학문적 토대로 한 최초의 근대학자다.”-책머리.⑤ 윤용혁의 저서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는 자료적으로도 폭넓게 수집한 풍부한 량일 뿐만 아니라, 가루베가 범한 과오와 그가 남긴 개인적 실적을 객관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가루베를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참고서라 할 수 있다. Ⅱ. 가루베의 공주에서의 유적 조사 1. 조선총독부의 공주 송산리고분 조사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1927년 3월경에 도굴되어, 1927년 4월 공주군 보승회장 다카야마(高山)가 백제유적의 소개와 아울러 지방 발전책으로 이 고분의 성질을 밝히기 위해 총독부에 조사를 요청해 왔다.① 이에 따라 공주 학봉리 도요지를 조사하던 조선총독부 촉탁 노모리 겐(野守健)과 고원 간다 소죠(神田惣蔵)가 이곳에 출장을 하여 1927년 10월 13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송산리(주외면 용당리) 소재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송산리 고분 조사의 정식보고서는 1935년에 발행한 「공주 송산리 고분 조사보고」(『쇼와(昭和)2년도 고적조사보고 제2책』)이 있고, 이에 앞서 작성한 총독부박물관 공문서 ‘쇼와(昭和) 2~4년도 복명서’철에 「공주 용당리 고분 발굴 조사」②가 있다.③ 복명서에는 발굴 배경, 고분의 위치 및 현황, 구조, 발굴품 등이 기재되어 있다. 관련 도면이 첨부되어 있다. 제출 일자는 명확하지 않다. 송산리고분 배치도(野守健의 복명서) 송산리고분 배치도(輕部慈恩, 『考古學雜誌』 제23권 제9호) 공주군 주외면 송산리에 속하는 한 구릉에 5기의 고분이 동서로 병렬해 있는데 제1호분부터 제5호분까지 명명했다.1927년에 노모리 겐(野守健)과 고원 간다 소죠(神田惣蔵)가 조사한 고분은 오늘날 1~4호분으로 구분된 것들과 파괴분을 포함한 5기이다. 즉 1927년 5호분으로 구분된 것을 다시 1호분으로 보면서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을 4호분으로 분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존 송산리 고분의 현황을 부산고구려$ 토대로 1927년에 조사된 5기의 고분을 서쪽부터 1~5호분으로 분류하였다면 4호분은 당시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④ 제1호분은 동서 5기의 병렬 고분 중 가장 서단(西端)에 있는 것으로 당시에는 1호분으로 명명되었으나 현재 4호분으로 명명된 것이다.제4호분(보고서 제1호분)은 봉토가 거의 유실되어 분형만 겨우 남아 있었다. 내부의 현실 천정과 벽에는 칠식의 흔적이 있었다. 내부에서 철정 5개를 발견했다. 1927년 3월경 지역민이 천정을 파괴하고 내부로 들어가 유존한 명기(明器)의 잔편을 훔쳐갔다고 하며 내부에서는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사자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은제투조대과(銀製透彫帶銙) 2매, 족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철도병두편(鐵刀柄頭片), 목관의 장식용 두부도금식정(頭部鍍金飾釘)을 발견했다. 도굴공의 근처에서 오사카아사히신문지(大阪朝日新聞紙) 조각과 양초가 발견되고 도굴자가 유실한 것으로 보이는 철제창두 1본, 철족 수본을 발견했다. 그 외 제1호 고분에서 발견 유물은 순금제동장금구(純金製胴張金具) 2개, 금동제영락(金銅製瓔珞) 12개, 금동장식금구잔결(金銅裝飾金具殘缺) 1개, 금동금구잔결(金銅金具殘缺) 1개, 철지금장금구잔결(鐵地金張金具殘缺) 2개, 식정(飾釘) 98개, 기타 약간이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종래 경기도 광주 지방, 부여 지방에서 조사한 백제고분 현실과 상위(相違)한 것으로 장래 연구를 위해 보존의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다.⑤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은 제4호분의 동쪽에 접해 있는 것으로, 1927년 당시에는 제2호분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후 가루베 지온에 의해 재3호분으로 재분류되고 무령왕릉 조사보고서에도 제3호분으로 표시되어 있는 고분이다.⑥ 봉토가 역시 유출되어 겨우 분형(墳形)을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정상부에 가까운 서남측에 도굴공이 있어 현실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본 분은 전자와 동시에 도굴을 하고 다시 최근에 도굴을 한 것 같았다”⑦고 하는 것으로 보아 동일범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은 도굴공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 바닥 일부를 조사하고 금동제금구잔결 1개, 금동제과대금구 개, 금동제식금구 2개, 식정 132개, 철지금동장행엽잔결 1개, 은제식금구 1개, 기타 약간을 발견했다.⑧총독부의 명에 의한 노모리 등의 조사에서 제1호분(보고서 제5호)은 현재 외형으로 정비되어 있는 고분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 확인된 고분 중 4호 또는 5호분 중의 하나로 추정되나 그 구체적인 내용 파악이 어렵다.⑨ 1927년에 명명한 송산리 5호분(현 1호분)의 경우에는 현실 천정이 이미 무너져 내부에는 토사가 가득 차 있었으며 “본 고분 역시 옛날에 도굴 파괴되어 귀중한 부장품은 이미 훔쳐 가버렸다”고 하며 다행히 이곳에서 도제감 2개 유리소옥 27개, 금동제교구 1개, 금동제수하금구 1개, 금동제식금구잔결 1개, 유리소옥 27개, 연옥 269개, 도자(刀子) 1개, 도기파편 2개, 기타 약간을 발견했다.⑩ 복명서에는 고분 및 출토 유물 사진과 도면을 상당수 첨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모두가 누락되어 있다.⑪제4호분(보고서 제1호분)으로부터 1927년 3월경 지방민의 도굴로 구옥, 유리옥, 검, 부 등이 출토되어 공주읍내의 일본인이 소지하고 있고, 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으로부터 금제이식 1대가 발견되어 이것은 현재 교토제국대학의 기요노(淸野) 박사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⑫ 2. 조선총독부 조사에 앞선 가루베의 조사 송산리고분군(1~4호분)에 대한 노모리 등의 조사는 1927년 10월에 있었으나 이보다 훨씬 앞서 가루베의 1차 조사가 있었다. 이는 그가 공주고보에 재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7년 3월의 일이다. 『충남향토지(忠南鄕土誌)』에 기고(寄稿)한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의 글에, 나는 공주를 중심으로 이 일대(一帶)의 산악, 구릉 등을 수색하여 조사한 결과 쇼와(昭和)2년(1927) 3월에 공주읍의 서북에 접속(接續)한 송산리의 구릉지대(丘陵地帶)에서 제1호분에서 제4호분까지 4기를 발견하였고, 계속하여 공주읍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산구(山丘)에 한하여 다수의 백제분묘를 발견했다. 이미 도굴을 당하여 곽(槨)의 일부만 약간 남아 대부분 파괴된 것이 많았다. 여러 차례 나는 『고고학잡지』 등에 조사결과를 보고하였다.⑬ 고 하고 있다.가루베는 1930년 5월에 『고고학잡지』에 「낙랑 영향을 받은 백제의 고분과 전」이란 제하(題下)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조사기록에 의하면, 이 고분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쇼와(昭和)2년(1927년) 3월 초순 겨울에 얼었던 얼음이 녹을 때 상부(上部)의 석적(石積)과 흙에 틈이 생겨 떨어져 내린 것으로, 그것을 근처의 아이들이 발견하여 현실(玄室) 안의 유물을 꺼내서 고물상 같은 데에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 출토(出土) 상태가 전혀 판명되지 않았는데, 그 후에 내가 여러 곳에 부탁을 하여 유물의 행방을 수소문한 결과 겨우 제4도(第四圖)에 나타낸 것 정도의 유물을 찾아서 그것을 촬영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분의 붕괴 당시 제일 처음 현실(玄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실제로 본 15,6세의 조선 아동 최상희라는 자에게서 당시의 유물의 배치를 상세하게 듣고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제3도(第三圖)의 좌하(左下)이다.이 고분의 붕괴 후 쇼와2년 9월 중순에 조선총독부에서 좌우의 3기와 그 부근의 송산리(宋山里) 구릉지대에 있는 고분 중의 몇 기를 발굴 조사했다고 하는데,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씨의 말에 의하면 (고분) 모두가 다 형식은 이 고분과 같은데 이미 도굴을 당해서 중요한 유물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⑭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은 이 보고서에서 명확히 몇 호 분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 고분은 송산리 제2호분에 해당하는 고분으로,⑮ 도굴된 유물을 가루베가 수소문하여 촬영한 ‘제4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위는 회흑색토기 3점이 나타나 있는데, “연도 입구에 5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이 중 2개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 아래 사진 “철기는 검, 창, 족, 정, 관의 금구이고, 그 외 옥이 2개 있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송산리 제3호분에 대해 가루베는 송산리 1927년 3월에 가루베 자신이 발견하였는데 후에 1927년 10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노모리 겐 등이 조사를 하고, 1930년 6월 16일 본인이 다시 충청남도 경찰부의 의뢰로 상세히 조사를 했다고 하며 ‘송산리제3호분 견취도’와 ‘송산리 제3호분 출토의 유물’을 제시하고 있다.⑯송산리 제4호분에 대해 가루베는 옛날에 도굴을 당한 흔적이 있다고 하며 ‘송산리 제4호분 견취도’와 “이곳에서 금동제각추족형구(金銅製角錐鏃形具) 1개, 철제각두병(鐵製角頭鋲) 7개, 목관용목편(木棺用木片) 2개분, 칠기파편(漆器破片) 1개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송산리 제4호분 출토품’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⑰ 송산리 제4호분에 대한 노모리의 보고에는 도굴공이 있는 곳에서 오사카아사히신문지(大阪朝日新聞紙) 조각과 양초를 발견하였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이를 도굴한 자는 일본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27년 3월경 지방민의 도굴로 제4호분(보고서 제1호분)으로부터 구옥, 유리옥, 검, 부 등이 출토되어 공주읍내의 일본인이 소지하고 있고, 제3호분(보고서 제2호분)으로부터 금제이식 1대가 발견되어 이것은 현재 교토제국대학의 기요노(淸野) 박사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⑱이상으로 보면 1927년 3월에 이미 송산리고분군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가루베가 제시한 송산리 제2호분 ‘제3도’인 유물배치도는 이 고분을 도굴한 15,6세의 최상희라는 자에게서 유물 배치를 상세히 들었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유물을 훔쳐 나오는 자가 유물 배치를 생각하면서 도굴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또 총독부의 정식 조사는 1927년 4월의 1927년 4월 공주군 보승회장의 요청에 의해 1927년 10월에 있었다. 그런데 가루베는 공주군보승회장이 총독부에 발굴요청이 있기도 전에 이미 조사를 끝낸 상태이다. 가루베는 송산리 고분군이 도굴을 알고 있으면서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수소문 하여 유물배치도를 작성했으며, 또 당시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엄연히 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루베는 당국에 신고를 하지 않고 조사를 했다. 이는 불법이다. 부산고구려$ 노모리 겐(野守健)의 「공주 송산리고분 조사보고」는 1935년에 발행을 했고, 가루베의 송산리고분 특히 제2호분에 대한 조사 내용을 『고고학잡지』(제20권 제5호)에 발표한 것이 1930년 5월이다. 그런데 노모리의 보고서에는 가루베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이 없다. 또한 가루베가 구체적으로 조사한 송산리 제2호분에 대한 조사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 3. 송산리 제5호분과 제8호분 발굴송산리 제5호분은 1932년 10월 20일 백제왕릉 진입로공사 중 발견하여 이튿날 공주군수의 의뢰를 받아 조사를 했다. 당시 공사감독관 다케우치(竹內)가 내부를 측량하고 가루베가 유물을 들어냈는데 항아리, 순금제장신구, 기타 잔여 유물이 출토되었다.가루베가 완전한 분(墳)이라고 하는 것은 가칭(假稱) 송산리(松山里) 제8호분으로 이 고분은 송산리 제4호분 직하(直下) 10미터 정도의 장소로 제4호분의 배분(陪墳)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오랜 세월 동안 표면이 씻기어져 외관상 고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1932년 10월 27일 전 백제왕릉(傳 百濟王陵) 제4호분의 참도신설공사(參道新設工事) 중 우연히 발견하여 가루베(輕部)가 직접 발굴하였다.출토유물은 구옥(勾玉) 1개, 이식용금환(耳飾用金環) 1개, 순금제산치옥(純金製山梔玉) 6개, 흑색연편옥(黑色練平玉) 4개, 녹색파리제소옥(綠色玻璃製小玉) 1천여 개, 황색파리제소옥(黃色玻璃製小玉) 약 3백여 개, 소두색파리제소옥(小豆色玻璃製小玉) 36개, 은제엽형장신구(銀製葉形裝身具) 5개, 자감색파리제소옥(紫紺色玻璃製小玉) 약 150여 개, 철정(鐵釘) 약 40개, 감형도기(坩形陶器) 4개, 감형토기(坩形土器) 1개 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⑲ 출토상태의 사진은 그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