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부산고구려$ 임금 문무왕(文武王)휘 : 김법민(金法敏)묘호 : 없음출생일 : 626년사망일 : 681년 7월24일재위 : 661년 6월 ~ 681년 7월1일문무왕(文武王, 626년~681년 7월 24일)은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김(金)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0년에 태종무열왕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신라 정예군을 총지휘하여 백제를 정복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였으며,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문무왕의 용모가 영준하며 뛰어났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라는 기록했고, 문무왕릉비에서는 문무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모가 뛰어났고, 도량은 바다와 하천과 같았으며 위엄은 우레와 같았다라고 기록했다. 출생에서 즉위까지출생《삼국사기》는 왕이 681년 음력 7월 1일에 승하했다고만 했을 뿐 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사망 당시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신라 당대 금석문인 『문무대왕비』에 따르면 왕이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문무왕의 생년은 진평왕 건복 43년(626년)에 해당한다. 출생 설화《삼국사기》에는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 어느 날 김유신의 맏누이인 보희(寶姬)가 서형산(西兄山)[주 1]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온 나라 안에 흘러 펼쳐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잠에서 깬 뒤에 동생인 문명왕후에세 꿈 이야기를 했다. 문명왕후는 자신이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며 비단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김유신이 뒷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와 축국(蹴鞠)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데리고 와서는 주연을 베풀며 맏누이인 보희에게 옷고름을 달게 했다. 하지만 보희는 마침 일이 있어서 나오지 못하고 동생인 문명왕후가 대신 나와서 바느질을 하였다. 김춘추는 그녀의 어여쁜 모습에 반하여 곧 청혼을 하여 결혼하였고, 그녀는 곧바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뒷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金法敏)이다.” —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즉위까지진덕여왕 4년(650년)[주 2]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돼 고종에게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이라는 벼슬을 내렸다.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으로써 병부령직에 임명되었다.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4]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사비성을 점령하였다.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치세백제 부흥운동 진압원년(661년) 6월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가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3]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 왕은 이듬해 1월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 2년(662년) 봄 정월에 당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2월에는 탐라국 임금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해 와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주둔하고 고구려를 치는 당군의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식량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하느라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고갈되고, 농사 때를 망쳐 백성들이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웅진도독부에 있는 당군의 군량 창고에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시로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3월에 내린 대사면령은 이러한 가운데서 오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7월 왕은 왕제(王弟) 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과 사정(沙井)의 백제 목책을 깨뜨리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에는 흠순 등 19장군을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부흥군을 깨뜨렸고, 대당(大幢) 총관(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南川州) 총관 진흠(眞欽)이 병을 핑계로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고 그 일족까지 멸했다.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또한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663년 2월에 흠순과 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해왔다.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출처 필요]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劉仁軌)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德物島)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갔다. 문무왕 역시 김유신과 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의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주 6]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天存)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劉仁願)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백제 부흥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13] 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고구려 정복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킨 문무왕이 처음으로 고구려 정복에 나선 것은 문무왕 4년(664년) 가을 7월, 왕제 김인문과 김품일,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김군관,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 김문영 등에게 일선(一善)·한산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突沙城)을 쳐서 멸하면서부터였다. 5년(665년) 가을 8월에 왕은 당의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 에서 모여 다시 맹약을 맺었다.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서로의 경계를 넘어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맹약의 글은 유인궤가 지은 것으로 제물들은 취리산 제단의 북쪽에 묻고, 맹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되었다.[14] 또한 그 회맹한 지점을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삼고 푯말을 세워 백제와 신라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15] 이는 전쟁이 끝난 뒤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된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긴 당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처사였다. 같은 달, 왕자 정명(훗날의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겨울에는 일선·거열 두 주의 백성들을 시켜 군수물자를 하서주로 운반하게 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6년(666년) 4월에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삼광(三光)을 모두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12월에부터 당은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현(安陸縣) 사람인 학처준(郝處俊)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 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침내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과 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해버리면서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정토가 24명의 부하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그의 부하들에게 옷과 양식, 집을 주어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온전한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한다. 7년(667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고, 당에서는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발탁하고 대아찬 일원(日原)은 당의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의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명한다는 고종의 칙명은 왕궁 뜰에서 받도록 명하였다. 또한, 같은 달 고종은 유인원과 신라의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성(卑列城)[주 8]의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해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가을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 이때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부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15]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 12월에 당은 다시 웅진도독부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면서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 8년(668년) 2월 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 6월 12일에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기록돼 있다.당의 우상(右相)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에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6월 21일에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 대각간 김유신대당총관(大幢摠管) 각간 김인문·김흠순·김천존·문충(文忠), 잡찬 진복(眞福), 파진찬 김지경(金智鏡), 대아찬 김양도(金良圖)·김개원(金愷元)·김흠돌(金欽突)경정총관(京停摠管) 이찬 진순(陳純)[주 11], 화랑 죽지귀당총관(貴幢摠管) 이찬 김품일, 잡찬 문훈(文訓), 대아찬 천품(天品)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 이찬 김인태(金仁泰)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 잡찬 김군관(金軍官), 대아찬 박도유(朴都儒), 아찬 용장(龍長)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김문영(金文穎), 아찬 복세(福世)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서당총관(誓幢摠管) 파진찬 의복(宜福), 아찬 천광(天光)계금당총관(罽衿幢摠管) 아찬 일원(日原)·흥원(興元)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병(風病)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고, 일찍이 백제를 치는데 선두로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도부의 요직을 맡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임명된 관직으로 추정한 진격루트는 한성주(한산주)와 비열주(비열홀주) 그리고 하서주(하슬라주) 세 곳으로, 수도 서라벌에서 조직된 군사들은 닷새 후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6월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 6월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할 것을 명했다. 한편 비열성주행군총관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의 벌판에서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남건이 거느리고 온 군사와 충돌했는데, 함께 있던 당의 번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와중에 김문영의 신라군은 앞으로 나서서 고구려군과 맞서 크게 이겼고, 신라군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당병은 겨우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한다.[출처 필요] 이 사천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훗날 문무왕에 의해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은상으로 받았고, 전사한 한산주소감(漢山州小監) 김상경(金相京)도 그와 준하는 상이 내려졌다. 다만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음에도,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 하여 포상에서는 제외되었다. 9월 21일에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에워쌌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 98명의 수령(首領)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항복했고,[19] 신라군의 대당총관 김인문이 보장왕을 이적 앞에 데려가 꿇어앉히고 그 죄를 세었다.[출처 필요] 남건은 성문을 닫고 항거하면서, 병력을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9월 26일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여니 신라의 5백 기병을 필두로 한 군사들이 평양으로 들어가 평양을 함락시켰다.[19][15] 이때 평양성 함락전에서의 신라군의 활약은 기록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평양성을 함락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문무왕이 남한주에서 행한 논공행상 과정이 남아있다. 평양성 외곽에서는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이 평양성 대문에서의 싸움에 세운 공으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천 섬을 받았고, 군사(軍師)인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에서 전공을 세워 술간(述干) 관등과 벼 1천 섬, 부양(斧壤)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쪽 다리 위에서 높은 공을 세워 마찬가지로 술간 관등과 벼 700섬을 받았다. 평양성 내부에서는 임시[假] 군사(軍師)인 비열홀의 세활(世活)이 평양의 소성(小城)에서 전공을 세워 고간(高干) 관등과 벼 500섬을 받았고, 서당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에서의 전공이 으뜸이라 하여 사찬 관등과 조 700섬을 받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고구려의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인 공으로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받았다. 평양성이 함락된 뒤 이적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돌아갔고,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이적을 따라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과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20] 문무왕은 한성을 출발해 평양성으로 가던 중,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러 당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신라 측은 긴 전쟁이 끝나고 자신들에게 약속된 은택을 얻을 것이고 공을 세운 장군들도 포상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당나라에 들어갔지만, 당의 총사령관 이적은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며 싸늘한 태도를 보였고, 이적의 태도가 신라 군영에 전해지면서 신라군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신라로서는 그들의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당군을 도와 주변의 적들을 쓰러뜨렸는데, 막상 신라에게 돌아온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당은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남한주(南漢州)로 돌아온 문무왕은 10월 22일에 논공행상을 벌여 서라벌에 남아있던 김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와 식읍 500호, 궤장을 하사하고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또한 인문을 대각간, 다른 이찬과 장군들을 모두 각간으로 삼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관위 1등급씩 더해주었다. 10월 25일에 왕은 욕돌역(褥突驛)에 이르러 국원사신(國原仕臣) 용장(龍長) 대아찬에게 사적으로 대접받았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포로로 거느리고 11월 5일에 서라벌로 들어온 왕은 다음날 문무 관료들과 함께 선조묘에 전쟁이 끝났음을 고하고, 11월 18일에는 전사자들의 신분에 맞춰 부의(賻儀)를 내렸다. 나당 전쟁에서 삼국 통일까지 9년(669년) 5월 천정군(泉井郡)·비열홀군(比列忽郡)·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이 기록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비열성(비열홀)은 다른 두 성과 함께 신라 조정의 군이 설치되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전략요충지인 비열홀을 안동도호부에 귀속시키고자 하였다.[23] 또한,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백제 땅을 점거하고, 신라의 백성들을 웅진도독부 안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15] 신라 내부에선 “당은 왜국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수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같은 달,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紫石)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金良圖)를 당에 보내 사죄하게 하였다.[주 13] 겨울에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仇珍川)을 당에 데려갔다.[22] 이는 당시 ‘천보노(千歩弩)’라고까지 불리며 쏘면 1천 보를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신라의 쇠뇌 제작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문무왕은 말을 기르는 목장 174곳을 소내(所內)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김유신을 비롯한 고위 진골 대신들과 여러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한성도독 박도유가 웅진도독부와 내통해 신라의 병기를 훔쳐다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는 난을 일으키려다 계획이 발각되어, 도유는 처형당했다. 10년(670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병사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주 14]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당나라가 병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자 백성(白城)으로 후퇴했다. 6월에는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이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검모잠은 안승(보덕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했다.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주 16]에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의 남은 세력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를 웅진도독부로 보내, 신뢰 차원에서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15] 한편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가져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장수들 중 싸우지 않고 퇴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면직으로 매듭지었다. 같은 달,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 11년(671년)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침공하였다. 당의 지휘를 받던 말갈병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것을 후방에서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당군이 백제를 구원하러 올 것에 대비해 대아찬 진공(眞功)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또한 6월에 장군인 화랑 죽지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했으며, 당병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7월에 당은 행군총관 설인귀를 신라에 파견했는데, 왕은 사신을 맞아 위로하는 대신 강가의 풀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 어귀에는 무기를 감춰둔 채, 수풀 사이를 오가며 틈을 노려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인귀는 26일에 당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주었는데 신라가 그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는 내용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당이 신라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법사 임윤(琳潤)을 시켜 왕에게 보냈다.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신라가 선왕 때로부터 당에 협조하고 여러 번 신라의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고를 내어 번번이 당군을 지원했던 사실과 당이 처음 신라와 했던 약속들을 어기고 신라가 점령하여 지배하던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같은 날, 백제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10월 6일 당의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12년(672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 이들은 8월부터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25]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당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 13년(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비롯해,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달함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러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이 사이에 국가의 원로이자 재상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이 죽고,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 거듭되는 전쟁에서 신라는 말갈·거란의 병사까지 끌어들인 당군과 맞서 아홉 번의 전투를 통해 2천 명을 죽이고, 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도 당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겨울에 당병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거란·말갈의 병사들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쳐서 멸했다. 한편 신라는 주(州)와 군(郡)에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고, 백제 멸망 뒤 무열왕에 의해 폐지되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14년(674년) 1월 당에서 숙위하다 귀국한 대나마 덕복(德福)이 가져온 신력(新曆)을 반포했다. 같은 달 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령을 지배하에 두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고종은 조서(詔書)로 문무왕의 관작을 깎아 없애려 하였다. 왕의 동생으로 당에 머무르고 있던 우효위원외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그를 귀국시키는 편에 많은 군사를 딸려보내 대규모로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은 8월에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벌이고, 9월에는 영묘사(靈廟寺) 앞길에서 다시 대규모 사열식과 함께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 달에 고구려왕 안승을 다시 보덕왕으로 봉했다.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되었다. 문무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30] 과연 가을 9월, 당은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이때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주 20]이 향도(鄕導)로서 당을 도왔다.[30] 그러나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 9월 29일에는 이근행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자 당군은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남겨 놓고 도망갔다.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해에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얻었다고 한다.하지만 아달성(阿達城)이나 적목성(赤木城)에서는 성을 침공한 말갈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약탈당했으며, 아달성주 소나(素那)나 적목현령 탈기(脫起)가 이때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석현성(石峴城)이 당병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고, 칠중성은 당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간신히 함락은 면했지만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당은 다시 도림성(道臨城)을 함락시켰다.16년(676년) 7월 당군이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현령(縣令) 거시지(居尸知)를 죽였다.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패했지만, 다시 나아가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당군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후 당은 백제령 안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기고,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성(遼東城)을 거쳐 신성(新城)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에서 자국의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통치 제도 정비18년(678년) 1월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大阿湌) 오기(吳起)에게 지키게 하였다. 20년(680년) 5월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붕어하였다. 유조(遺詔)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대왕석(大王石)이라고도 한다.위에 장사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경주시의 관광지이자 경북동해안 국가지질공원의 지질유산인 경주 문무대왕릉으로 남아 있다. 문무왕의 유조는 다음과 같다. “과인은 나라의 운(運)이 어지럽고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부산고구려$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으며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않았고, 살아 있는 임금을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않았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므로,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위(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면 서책(書冊)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즐겨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장례를 치르는 제도를 힘써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의 성·진(城鎭)을 지키는 일과 주현(州縣)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21년(681)”가계 기타고려 시대에는 문무왕을 문호왕(文虎王)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고려 혜종의 휘가 왕무(王武)였기 때문에 피휘를 하기 위해 무(武)를 뜻이 같은 호(虎)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 참고: 이웃나라 국왕 고구려보장왕 (642년 - 668년)안승 (668년 - 683년)백제부여풍 (660년 - 663년)당당 고종 (649년 - 683년)왜고교쿠 천황 (642년~645년, 655년~661년)덴지 천황 (668년 - 672년)고분 천황 (672년)덴무 천황 (673년 - 686년) .三國史記 卷 第六新羅本紀 第六文武王목차1. 원년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2. 원년 6월 김인문과 유돈 등이 황제의 명령을 전하다 3. 원년 7월 17일 김유신 등을 대장군·총관에 임명하다 4. 원년 8월 문무왕이 백제의 남은 적들을 타이르다 5. 원년 9월 19일 문무왕이 총관과 대감의 서약을 받다 6. 원년 9월 25일 옹산성을 포위하다 7. 원년 9월 27일 옹산성을 공격하여 항복시키다 8. 원년 9월 옹산성 함락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9. 원년 9월 웅현성을 쌓다 10. 원년 9월 품일 등이 우술성을 공격하다 11. 원년 9월 백제의 조복과 파가에게 관등과 토지 등을 내려주다 12. 원년 10월 29일 당나라 사신이 와서 태종무열왕의 제사를 지내다 13. 원년 10월 당나라 황제가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할 것을 명령하다 14. 2년 1월 당나라 사신이 문무왕을 책봉하다 15. 2년 1월 문훈을 중시로 임명하다 16. 2년 1월 군량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하다 17. 2년 1월 18일 김유신 등 아홉 장군이 풍수촌에서 묵다 18. 2년 1월 23일 김유신 등 아홉 장군이 산양에 이르다 19. 2년 1월 23일 성천 등이 이현에서 적군을 물리치다 20. 2년 2월 1일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영에 사람을 보내다 21. 2년 2월 6일 김유신 등 아홉 장군이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전하다 22. 2년 2월 김유신 등이 고구려 군대를 크게 물리치다 23. 2년 2월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상을 내리다 24. 2년 2월 영묘사에 불이 나다 25. 2년 2월 탐라국이 항복하여 속국이 되다 26. 2년 3월 죄수를 풀어주고 대포를 베풀다 27. 2년 7월 김인문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다 28. 2년 8월 흠순 등이 백제의 남은 적을 물리치다 29. 2년 8월 진주와 진흠 등을 죽이다 30. 2년 8월 여동이 벼락에 맞아 죽다 31. 2년 8월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32. 3년 1월 남산신성에 장창을 짓다 33. 3년 1월 부산성을 쌓다 34. 3년 2월 흠순과 천존이 백제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35. 3년 4월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다 36. 3년 5월 영묘사의 문에 벼락이 치다 37. 3년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과 함께 백제를 부흥하려 하다 38. 3년 10월 21일 임존성을 공격하다 39. 3년 11월 04일 전공을 논하여 상을 내리다 40. 4년 1월 김유신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다 41. 4년 1월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다 42. 4년 1월 부인들에게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다 43. 4년 2월 여러 왕들의 능원에 백성을 이주시키다 44. 4년 2월 김인문, 유인원, 부여융 등이 웅진에서 맹약을 하다 45. 4년 3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다 46. 4년 지진이 일어나다 47. 4년 성천과 구일 등에게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다 48. 4년 7월 김인문 등에게 고구려 돌사성의 공격을 명령하다 49. 4년 8월 14일 지진으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다 50. 4년 마음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다 51. 5년 2월 진복을 중시에 임명하다 52. 5년 2월 문왕이 죽으니 왕자의 예로 장사지내다 53. 5년 8월 문무왕이 유인원, 부여융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세하다 54. 5년 8월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다 55. 5년 백성을 동원하여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로 옮기다 56. 5년 비단과 베의 한 필 기준이 바뀌다 57. 6년 2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58. 6년 4월 영묘사에 불이 나다 59. 6년 4월 한림과 삼광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다 60. 6년 4월 당나라에 고구려 멸망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다 61. 6년 12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다 62. 6년 12월 연정토가 항복하다 63. 7년 7월 대포를 베풀다 64. 7년 7월 당나라 황제가 지경 등을 장군으로 삼다 65. 7년 7월 즙항세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66. 7년 7월 당나라 고종이 신라군을 평양에 모이게 하다 67. 7년 8월 문무왕이 장군들을 이끌고 출정하다 68. 7년 9월 문무왕이 한성정에 도착하다 69. 7년 10월 2일 영공이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70. 7년 11월 11일 문무왕이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리다 71. 7년 12월 중시 문훈이 죽다 72. 7년 12월 문무왕이 대장군의 정절을 받다 73. 8년 아마가 와서 항복하다 74. 8년 3월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다 75. 8년 3월 용문을 비열홀주 총관으로 삼다 76. 8년 4월 혜성이 천선을 지키다 77. 8년 6월 12일 유인궤와 김삼광이 당항진에 도착하다 78. 8년 6월 21일 여러 사람을 총관으로 삼다 79. 8년 6월 22일 고구려의 군과 성이 귀순하고 김인문 등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80. 8년 6월 27일 문무왕이 당나라 군대로 나아가다 81. 8년 6월 29일 여러 도의 총관들이 행군을 시작하다 82. 8년 7월 16일 당나라 군대와 회합할 것을 명하다 83. 8년 9월 21일 고구려왕이 항복하다 84. 8년 10월 22일 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85. 8년 10월 25일 국원 사신 용장이 잔치를 벌여 문무왕과 시종을 대접하다 86. 8년 11월 5일 문무왕이 고구려 포로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87. 8년 11월 6일 문무 신료를 거느리고 선조의 묘에 배알하다 88. 8년 11월 18일 나랏일로 죽은 이들에게 포상하다 89. 8년 12월 영묘사에 불이 나다 90. 9년 1월 신혜법사를 정관 대서성으로 삼다 91. 9년 1월 당나라 승려 법안이 자석을 구하러 오다 92. 9년 2월 21일 신하들을 모아 교하다 93. 9년 5월 천정군 등 세 군의 백성을 진휼하다 94. 9년 5월 당나라에 자석을 바치고, 흠순과 양도를 보내 사죄하다 95. 9년 구진천이 당나라에 가서 쇠뇌를 만들다 96. 9년 말 목장을 나누어 주다 97. 10년 1월 당나라에 억류되었던 김양도가 죽다 98. 10년 3월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99. 10년 4월 4일 설오유와 고연무가 크게 승리하다 100. 10년 6월 검모잠이 안승을 임금으로 받들고 귀순하다 101. 10년 6월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은 여인에게 벼를 내려주다 102. 10년 7월 백제의 남은 무리를 물리치다 103. 10년 7월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책봉하다 104. 10년 12월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105. 10년 12월 중시 지경이 물러나다 106. 10년 12월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다 107. 10년 12월 수세가 백제의 남은 무리를 진압하다 원년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문무왕(文武王):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661~681년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문호왕법민조)에는 문호왕(文虎王)으로 전하는데, ‘호(虎)’는 고려 혜종(惠宗)의 이름 ‘무(武)’를 피휘(避諱)한 것이다. 이름은 법민(法敏)이며,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 문명왕후(文明王后)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650년부터 당나라로 가서 황제를 만나고 태부경(太府卿)으로 책봉받는 등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 무열왕 즉위 후 655년에는 태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660년에 백제를 치러 수군(水軍)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온 소정방(蘇定方)을 덕물도(德物島)에서 맞이하고 사로잡은 백제 왕자 부여융의 항복을 받는 등 백제 멸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 남부까지 직접 지배하려던 당나라와도 싸워 676년 이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681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의 대왕암(大王岩)으로 비정된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김춘추(金春秋)를 가리킨다. 김춘추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11년(642) 겨울조 참조.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막내딸이며, 문명왕후(文明王后): 각간 서현(舒玄)의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여동생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는 문명황후(文明皇后)로 표기하였고, 이름은 문희(文姬)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에 따르면 어릴 때 이름[小名]은 아지(阿之)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王曆))에서는 이름이 훈제부인(訓帝夫人)이고, 어릴 때 이름[小名]이 문희(文熙)이며, 시호가 문명왕후라고 하였다. 태종무열왕과의 사이에서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을 비롯하여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차(老且),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 다섯 아들을 낳았다. 첫째인 법민이 태자로 책봉될 때, 문명왕후 소생의 나머지 네 명에게도 이찬·각간 등 최고위 관등이 부여되었다고 전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소판(蘇判): 신라의 17관등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본서 권제38 잡지제7 직관상(上)에는 잡찬(迊湌)·잡판(迊判) 등으로도 불리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17관등을 나열할 때 기본 표기로는 ‘잡찬’이 제시되었고, 본기에도 ‘잡찬’의 표기가 먼저 확인되며, 중고기 금석문이나 중국측 기록에는 ‘잡간(迊干)’으로 나온다. ‘소판’이라는 표기는 여기에 처음 나타나는데, 이후로는 ‘잡찬’보다 ‘소판’의 표기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한편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 상(上)조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즉위년(661)조에서는 김서현의 관등이 잡찬(迊飡: 소판蘇判)이라고 전하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즉위년(654)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에서는 각간(角干각찬角飡)이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서현(舒玄): 김서현을 말하는데, 김유신의 아버지이다. 서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51년(629) 8월조 참조 김유신(金庾信)의 여동생이다. 김유신(金庾信):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51년(629) 8월조 참조. 그 언니 가 꿈 속에서 서형산(西兄山) 정상에 올라 앉아서 오줌을 누니 언니: 원본에는 ‘동생(妹)’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 ‘언니(姉)’로 나오는 것이 내용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김서현의 딸이자 김유신의 첫째 누이인 보희(寶姬)를 가리킨다.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였다. 서형산(西兄山): 현재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산이다. 중턱에 산 정상을 두른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둘레는 2.9㎞이고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서쪽 방면에서 도성으로 진입하는 적군을 방어하던 군사방어성이었을 것이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15년(593) 7월조에서 ‘서형산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였으므로, 진평왕 15년 이전에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형산성을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증축하였고, 성안에 소금 창고[鹽庫]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선도산(仙桃山)으로 기록하였는데, 경주 중심지 서쪽 7리에 위치하였으며, 신라 때 서악(西嶽)이라 불렀고, 서술(西述)·서형·서연(西鳶)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5 감통제7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서 이 산의 성모(聖母)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였다. 문무왕과 흥덕왕(興德王)대에 대규모 열병식을 그 아래에서 거행하기도 하였다. 온 나라에 두루 흘러넘쳤다.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이야기하자, 동생이 장난으로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비단 치마를 주어 꿈 값을 치렀다. 꿈 속에서 … 값을 치렀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도 전한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산에 올라 세상을 뒤덮는 오줌을 누는 꿈 모티프가 두 차례나 등장한다. 한 번은 보육(寶育)의 꿈으로, 또 한 번은 보육의 막내딸 진의(辰義)의 꿈으로 나오는데, 특히 진의의 꿈 이야기는 언니가 비단치마로 꿈을 사고, 그에 따라 제왕과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이 문명왕후의 꿈 이야기와 거의 흡사하다. 그와 같은 설화는 거슬러 올라가면 딸의 방뇨로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고 아시아 전역에 범람하는 꿈을 꾼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이야기까지 연결해 볼 수 있다(최혜영). 종래에 본 기록은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에 전하는 기록을 축약하여 인용한 것이고, 『삼국유사』에 전하는 김춘추와 문희와의 혼인 관련 기록은 김유신행록이 아니라 별도의 전승자료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李文基, 14~20쪽).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함께 축국(蹴鞠)을 하다가 축국(蹴鞠): 공의 일종인 ‘국(鞠)’을 차며 노는 유희이다. ‘국’은 가죽으로 만들어 처음에는 털 등의 물건으로 속을 채우다가 당나라 때부터 공기를 넣은 기구(氣毬)를 사용하게 되었다. 전국시대 이전부터 축국은 존재하였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군사 훈련을 겸하여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한(漢)나라 이후로 민간에도 보급되어 성행하였다. 화상석(畫像石)에도 축국 장면이 자주 묘사되었다. 한나라의 궁전 장안궁(長安宮)에는 축국 경기장인 국성(鞠城)이 존재하였다. 민간에서는 한식(寒食)에 축국을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경기 방식은 다양한데, 구장(毬場)과 구문(毬門)을 갖추어 단체로 겨루는 방식도 있고, 구문(毬門) 없이 하는 백타(白打) 방식도 있다. 백타는 혼자서도 가능하며, 두 명, 세 명, 여섯 명 등 다양한 인원으로 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刘秉果·赵明奇, 2008, 『中国古代足球』, 齊魯書社).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高麗傳))에서 고구려의 놀이 중 하나로 축국을 들었고, (『구당서(舊唐書)』 권199 고려전)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고 하여 당나라 때를 전후하여 한반도에 축국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우니, 가서 옷고름을 꿰매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함께 집으로 갔다. 〔김유신이〕 술상을 차리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게 하였다. 보희(寶姬): 김서현의 딸이자 김유신의 첫째 누이로서, 문명왕후 문희의 언니이다. 어릴 때 이름[小名]은 아해(阿海)였다고 한다. 언니가 일이 있어 나아가지 못하자,동생이 앞으로 나아가 바느질하여 꿰맸다. 언니가 일이 있어 나아가지 못하자: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의 본문에서는 원래 김유신이 보희에게 바늘을 받들고 들어가게 하였으나 아해가 “어찌 작은 일로 가벼이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사양하였다고 하였고, 해당 부분의 주석에서는 고본(古本)에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음을 밝혀 두었다. 매우 유사한 모티프를 갖춘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중 작제건(作帝建) 탄생 설화)에서는 큰 딸이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에서 피가 쏟아지는 바람에 언니의 꿈을 샀던 진의(辰義)가 대신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옅은 화장에 가벼운 옷을 입었는데, 빛나는 아름다움이 환하게 비추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바로 혼인을 청하고 혼례를 지냈다. 바로 혼인을 청하고 혼례를 지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는 이후 김춘추가 자주 내왕하고 문명왕후가 임신하게 되었는데, 김유신이 태워 죽이겠다는 위협으로 선덕왕의 명을 받아낸 뒤 비로소 드러내 혼례를 행한 것으로 나온다. 단, (「경주 문무왕릉비」)에서 문무왕의 사망 당시 연령이 56세였다고 한 것으로 역산해 보면 김춘추와 문명왕후 사이에서 문무왕 법민이 태어난 시점은 진평왕대로서 해당 설화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덕왕은 덕만공주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자의왕후(慈儀王后):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30 문무왕조)에는 자의왕후(慈義王后) 혹은 자눌왕후(慈訥王后)로, (제31 신문왕조)에는 자눌왕후(慈訥王后)로 기록되었다. (본서 권제8 신라본기제8 신문왕 즉위년(681)조)에서도 ‘의(儀)’와 ‘의(義)’가 혼용되었음이 지적되었다. 선품(善品):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30 문무왕조)에는 자의왕후의 아버지를 선품 해간(海干)이라고 기록하였다. 해간은 파진찬(波珍飡)의 이표기 중 하나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 아자개(阿慈介)에 이르는 계보를 언급하는 가운데 진흥왕(眞興王)의 비(妃) 백숭부인(白